2009년 11월 07일
■年中 第三十二主日 「참된 奉獻」

■年中 第三十二主日 「참된 奉獻」
`하느님의 慈悲主日'은 아름답습니다.
■十一月 八日, 年中 제 32 主日입니다ㅡ.
오늘의 독서와 복음의 주제는 봉헌입니다. 우리 자신에게 있는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께 돌려드리는 것이 곧 봉헌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습니다.
말씀 그대로 실행하면 참된 봉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열왕기 상17, 15-16). 주일(主日)미사ㅡ 이 날은 봉헌의 기쁨으로 채워집니다. 냉담하지 않고 성당을 찾는 기쁨이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의 영혼을 올리는데 감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목욕하고 새 옷을 꺼내 입고 텅 빈 마음으로 하느님 앞에 기도하러 나섭니다. `오늘의 말씀'이 새롭듯, 조화된 생명의 힘을 평화 안에 반성하고 자비송, 대영광송, 미사의 기도로 스스로를 살찌웁니다.
마음의 절정은ㅡ 소리 높여 부르는 `신앙의 신비'와 `주님의 기도'입니다... 늘 그렇게 다짐하는 ㅡ`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그리고 <샬롬!>(평화를 빕니다)의 평화 예식이 언제나 흐뭇한 한 주일을 상쾌하게 열어줍니다.
■바르고 아름다운 心性은 奉獻의 기쁨입니다ㅡ.
평화 예식은 사제와 함께 예외 없이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일깨우는 예수님의 부활의 인사입니다. ...안식일 다음 날 저녁, 일행 앞에 발현하시어 보내신 "샬롬(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ㅡ.
이에 토마스가 주님을 확인하고, 예수님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하고 떨리는 소리로 감격의 충격을 눈빛에 발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는 오늘의 우리에게 일깨우시는 반성과 경고, 그리고 꾸준한 신심의 촉구로 요약되고 있습니다. 평화의 인사를 나눌 때 우리는 손을 내밀어 악수하는 경건한 기풍과 함께 예수 부활의 인사 광경을 상기하는 습관을 체질화해야 되겠습니다.
평소 만나기 어려워도 주일 미사 때는 함께 모이는 교우들... 그래서 마음을 열면 쉽게 행운이 이루어집니다. 착한 사람과 더욱 가까워지는 지혜는 냉담하지 않는 데서 얻어집니다. 그러기에 기도시간은 큰 산의 숲에 든 감격과 신비에 휩싸입니다.
영혼의 나무들로 울창한 숲다운 영성체 의식은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 풍요로움이 시사하는 평화의 바람 소리..., 강물 소리가 푸른 나뭇잎의 때깔 고운 흔들림으로 마음 안 가득 출렁입니다.
동질성이 어우러져 부푸는 신앙의 기쁨이 이렇게 넘치기에 우리 사회의 질서를 다지게 됩니다. 구성원의 성실성과 바르고 아름다운 심성은 봉헌의 기쁨으로 한결 승화됩니다.
■奉獻精神이 강할 때, 意志가 美化됩니다ㅡ.
봉헌은 자기 영혼의 바침입니다. 그 보다 더 한 인간의 거룩한 소유는 없습니다. 경제적 메카니즘도 이 안에 듭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갈등을 일으키게 하기 쉽습니다.
봉헌의 기쁨은 사제가 서품식을 통해 자신의 생애를 하느님께 바치는 영광에서, 근로자가 노동의 현장을 통해 시위 파업 등으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는 삶에 이르기까지 광범한 범주에 이릅니다.
레지오 마리애나 등, 심신단체가 봉사하는 정신력도 봉헌이요, 미사 때의 약간의 헌금 등, 재물 뿐 아닌 시간, 정력, 사랑, 정의 등등... 우리 삶에서 나누게 되는 의미의 일체가 해당됩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고통에 대한 감사ㅡ. 은혜에 보답할 수 있기에 이 유형도 봉헌입니다. 우리가 극복할 수 있는 고통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그만큼 고통도 주십니다. 이는 우리가 알아야 될 절실한 신심의 선물입니다. 곧 극기력을 기르게 하심에 지나지 않지만ㅡ. 때문에 고통이 겹칠수록 봉헌의 기쁨으로 몸과 마음을 바쳐 하느님께 매달려야 합니다.
이 강하고 힘 찬 봉헌 정신이 쾌적하게 작용될 때, 우리는 삶의 의지를 보다 순수하게 미화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그릇된 해석으로 부당하게 욕보이는 행위를 가장 저주하십니다.
■信仰은 奉獻하는 感激의 기쁨입니다ㅡ.
받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분을 멀리 하시거나 버리는 행위는 인간의 생각입니다. 마음 가난한 사람일수록 그 마음 안에 영롱한 진주를 간직하고 있으면 곧 그것을 봉헌하게 하십니다.
인간은 하느님 앞에 모두 미흡한 존재에 지나지 않습니다. 성당은 미사에 참례하는 모든 교우를, 배움이 모자라거나 가진 것이 없어도 한결같이 평준화된 눈높이로 맞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세속적인 우열이 없습니다.
따라서 고르게 사랑을 주시는 하느님께 교우들이 봉헌할 수 있어 미사에 나오는 기쁨을 갖습니다. 이 깨끗하고 아름다운 신앙의 큰 숲에 형체가 다른 향기를 지녀도 그들은 숲의 나무일뿐입니다. 다만 조화 안에서 개성을 바칩니다.
하느님은 봉헌의 갈등으로 큰 숲의 미관을 훼손하도록 이르지 않으십니다. 성당은 그렇게 신성합니다. 생명을 아버지 하느님께 바친 예수님ㅡ 그리고 더 큰 부활의 삶을 받으셨습니다.
우리의 신앙은 바로 하느님께 봉헌하는 늘 새로운 감격의 기쁨, 그것입니다. 봉헌의 아침은 음악처럼 경쾌합니다. 미사 후의 성당 밖은 하느님의 화려한 은총... 훈훈한 마음으로 안녕을 나누며 작별할 때, 한 주일 뒤 다시 만날 기쁨의 행운으로 발걸음이 가볍습니다.
한 발 앞의 젊은 자매들의 화사한 의상과, 예쁜 본명 율리아나, 미카엘라, 데레사... 를 부르며 리듬 높은 음향으로 까르르 까르르 웃는 즐거움이 시새워집니다.
저 황홀하게 왁자한 나눔의 환희를 축복하는 `하느님의 자비주일'은 아름답습니다. 十一月의 눈부신 햇살로 유려하게ㅡ 예레미야 4절의 말씀이 자매들 머리 위에 환히 울려 퍼집니다. ♠
# by | 2009/11/07 18:11 | 信仰의 神秘 | 트랙백 | 덧글(0)




☞ 내 이글루에 이 글과 관련된 글 쓰기 (트랙백 보내기) [도움말]